2010년 10월 9일 토요일

도덕적 행위 요구의 근거에 대하여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
왜 나는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

도대체 내가 착하게 행위해야할 특별한 까닭이 있는가?
첫째, 신이 벌할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면?
둘째, 양심의 가책을 느끼므로. 하지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셋째, 타인이 받을 가능한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지니므로. 하지만 그런 공감을 조금도 형성하지 않는다면?
넷째, 착하게 행위하는 것이 나에게 더 큰 이익을 향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런 기대가 전혀 신빙성이 없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신을 믿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타인고통에 대한 공감도 가지지 않으며 차후의 이익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그럴 때 우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만 할까?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도대체 우리는 무슨 근거로 타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선한 행위를 할 것을 종용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암묵적 합의에 따른 요청"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센 사람이 반드시 있거나 최소한 있을 수 있다. (설사 이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조차도 자신이 가장 센지를 의심의 여지 없이 알기 어려우며 그것을 안다손 쳐도 차후에 자신보다 더 센 사람이 등장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 여기서 "센"은 일차적으로는 물리력이지만 얼마든지 그 밖의 요소도 개입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이성적 존재자는 타인을 괴롭히지 말 것을 쌍방간에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이성"이란 미래의 상황에 대한 고려능력 및 타인(약자)의 입장에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법이 원칙적으로 적용상의 한계를 갖는 한, 아무리 법이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은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규칙의 세밀한 수립 이전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일반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문제. 그런데 정말 그런 상황에서 도덕적 행위에 대한 쌍방간 요구 및 합의가 과연 가장 이성적인가? 명백히 내가 가장 "센" 사람이거나 상당히 "센" 부류에 속한다면, 내가 왜 약자를 존중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다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답변은 그가 정말로 충분히 이성적이라면, 도덕의 요청을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 그런 합의 및 요청이 없다면, 그를 재미삼아 죽이려는 더 센 자를 제어할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결코 원치 않을 일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산다. 즉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계산할 수 없다. 이러한 계산불가능성은 도덕적 행위에의 요청에 대한 기존의 암묵적 합의를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 성장함으로써 제각기 재수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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