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2일 화요일

범주 오류

역시 위키.


A category mistake, or category error, is a semantic or ontological error by which a property is ascribed to a thing that could not possibly have that property. All (propositional) mistakes involve some sort of misascription of properties, so in a sense any mistake is a "category mistake": putting a thing into a class to which it does not belong. But a "category mistake" in colloquial philosophical usage seems to be the most severe form of misascription, involving the endorsement of what is in fact logically impossible. Thus the mistaken claim that "Most Americans are atheists" is not a category mistake, since it is merely contingently true that most Americans are theists. On the other hand, "Most bananas are atheists" is a category mistake. To show that a category mistake has been committed one must typically show that once the phenomenon in question is properly understood, it becomes clear that the claim being made about it could not possibly be true.


The term "category-mistake" was introduced by Gilbert Ryle in his book The Concept of Mind (1949) to remove what he argued to be a confusion over the nature of mind born from Cartesian metaphysics. Ryle alleged that it was a mistake to treat the mind as an object made of an immaterial substance because predications of substance are not meaningful for a collection of dispositions and capacities.

Specifically, the phrase is introduced in chapter 1, section 2. The first example he gives is of a visitor to Oxford. The visitor, upon viewing the colleges and library, reportedly inquired “But where is the University?"[1] The visitor's mistake is presuming that a University is part of the category "units of physical infrastructure" or some such thing, rather than the category "institutions", say, which are far more abstract and complex conglomerations of buildings, people, procedures, and so on.

Ryle's second example is of a child witnessing the march-past of a division. After having had battalions, batteries, squadrons, etc. pointed out, the child asks when is the division going to appear. 'The march-past was not a parade of battalions, batteries, squadrons and a division; it was a parade of the battalions, batteries and squadrons of a division.' (Ryle's italics)

His third example is of a foreigner being shown a cricket match. After being pointed out batsmen, bowlers and fielders, the foreigner asks: 'who is left to contribute the famous element of team-spirit?'

He goes on to argue that the Cartesian dualism of mind and body rests on a category-mistake.



Laut Ryle liegt auch ein Kategorienfehler in der Annahme, dass die Begriffe Geist und Körper derselben Kategorie angehören. Dabei stünden die beiden Begriffe in demselben Verhältnis zueinander wie die Begriffe Spieler und Mannschaft. Aufgrund dieses Kategorienfehlers versuchen wir gewöhnlich auch, Geist und Körper gleichartig zu verstehen, was zu der Konsequenz verleitet, nach einem Geist zu suchen: das wäre so, wie neben den Spielern auch noch nach ihrer Mannschaft Ausschau zu halten.

인지부조화와 수행모순

(from Wiki)


Kognitive Dissonanz bezeichnet in der Sozialpsychologie einen als unangenehm empfundenen Gefühlszustand, der dadurch entsteht, dass ein Mensch mehrere Kognitionen hat – Wahrnehmungen, Gedanken, Meinungen, Einstellungen, Wünsche oder Absichten – die nicht miteinander vereinbar sind (Störgefühl). Ist die Dissonanz stark genug, kann ihre Bekämpfung eine dauerhafte Änderung von Einstellungen und Verhalten herbeiführen. Starke Dissonanz entsteht insbesondere bei einer Gefährdung des stabilen, positiven Selbstkonzepts, wenn also jemand Informationen bekommt, die ihn als dumm, unmoralisch oder irrational dastehen lassen - was die Alltagssprache als peinliche Momente bezeichnet.[1]

Kognitive Dissonanz tritt unter anderem auf,

  • wenn man eine Entscheidung getroffen hat, obwohl die Alternativen ebenfalls attraktiv waren
  • wenn man eine Entscheidung getroffen hat, die sich anschließend als suboptimal erweist
  • wenn man gewahr wird, dass eine begonnene Sache anstrengender oder unangenehmer wird, als erwartet
  • wenn man große Anstrengungen auf sich genommen hat, nur um dann festzustellen, dass das Ziel den Erwartungen nicht gerecht wird
  • wenn man sich konträr zu seinen Überzeugungen verhält, ohne dass es dafür eine externe Rechtfertigung (Nutzen/Belohnung oder Kosten/Bestrafung) gibt.

Kognitive Dissonanz motiviert Personen, die entsprechenden Kognitionen miteinander vereinbar zu machen, wobei unterschiedliche Strategien benutzt werden, wie beispielsweise Verhaltensänderungen oder Einstellungsänderungen. Falls nötig werden die eigenen Überzeugungen und Werte geändert, was über temporäre Rationalisierungen weit hinausgeht. Der Begriff wurde 1957 von Leon Festinger geprägt, der sowohl die Entstehung als auch Auflösung von kognitiver Dissonanz theoretisch formulierte. Seither wurde die Theorie in mehreren hundert Experimenten bestätigt.[2] Seinem Schüler Elliot Aronson ist die substantielle Weiterentwicklung und empirische Untermauerung zu verdanken.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arises when the propositional content of a statement contradicts the noncontingent presuppositions that make possible the performance of the speech act, such as occurs with "all statements must be false."

In Jürgen Habermas's usage of the concept,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is a lack of fit between the content and the performance of a speech act. For Habermas, the truth of statements is a central element to his communicational ethic, implying that a statement which does not contradict the performance of the statement but its truthfulness is considered as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too. The above example "all statements must be false" is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because the speaker performs the action of stating something that contradicts the truthfulness of the speech act.

However, we could also imagine speech acts whose content contradicts the very act itself. For example, someone saying "I am mute" would commit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The statement "Hierarchies do not exist" offers a more subtle example of performative contradiction referring to the very capacity of making a statement, because the statement itself is a hierarchy of semiotic relations of letters (as symbols) formed into words (as signifiers) formed into a sentence (as a statement).

Solipsism is often held to be a performative contradiction if stated.

2010년 10월 9일 토요일

훌륭한 철학 입문서

네이글의 "이 모든 것의 철학적 의미는?"은 좋은 철학 입문서이다.
아마도 내가 읽어 본 것 중에서는 가장 좋다.
쉽게 썼으면서도 피상적이지 않다.
비전공자를 위해서는 아마도 가장 훌륭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추가. 뤽 페리, 사는법을 배우다; 워버턴, 철학의 주요문제에 대한 논쟁

도덕적 행위 요구의 근거에 대하여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
왜 나는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

도대체 내가 착하게 행위해야할 특별한 까닭이 있는가?
첫째, 신이 벌할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면?
둘째, 양심의 가책을 느끼므로. 하지만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셋째, 타인이 받을 가능한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지니므로. 하지만 그런 공감을 조금도 형성하지 않는다면?
넷째, 착하게 행위하는 것이 나에게 더 큰 이익을 향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런 기대가 전혀 신빙성이 없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신을 믿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타인고통에 대한 공감도 가지지 않으며 차후의 이익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그럴 때 우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만 할까?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도대체 우리는 무슨 근거로 타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선한 행위를 할 것을 종용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암묵적 합의에 따른 요청"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센 사람이 반드시 있거나 최소한 있을 수 있다. (설사 이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조차도 자신이 가장 센지를 의심의 여지 없이 알기 어려우며 그것을 안다손 쳐도 차후에 자신보다 더 센 사람이 등장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 여기서 "센"은 일차적으로는 물리력이지만 얼마든지 그 밖의 요소도 개입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이성적 존재자는 타인을 괴롭히지 말 것을 쌍방간에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이성"이란 미래의 상황에 대한 고려능력 및 타인(약자)의 입장에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법이 원칙적으로 적용상의 한계를 갖는 한, 아무리 법이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은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규칙의 세밀한 수립 이전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일반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문제. 그런데 정말 그런 상황에서 도덕적 행위에 대한 쌍방간 요구 및 합의가 과연 가장 이성적인가? 명백히 내가 가장 "센" 사람이거나 상당히 "센" 부류에 속한다면, 내가 왜 약자를 존중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다시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답변은 그가 정말로 충분히 이성적이라면, 도덕의 요청을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 그런 합의 및 요청이 없다면, 그를 재미삼아 죽이려는 더 센 자를 제어할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결코 원치 않을 일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산다. 즉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계산할 수 없다. 이러한 계산불가능성은 도덕적 행위에의 요청에 대한 기존의 암묵적 합의를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 성장함으로써 제각기 재수용하게 만든다.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레종 데트르, 삶의 의미, Worumwillen

레종 데트르의 물음은 삶의 의미의 물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왜? 그 물음이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 형이상학적 설명과 근거 제시가 아니므로.

이 물음은 오직 인간만이 물을 수 있다. 자기성을 가질 정도로 초월적이면서도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유한자이므로.

레종 데트르, 삶의 의미는 형식적으로만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Worumwillen이다. 그것은 나의 실존이 그때마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걸려있는 실존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가장 고유한 실존가능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오로지 유일한 나로서 개별화시키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미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내게 다가오지만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나의 삶의 의미가 완성되었다는 식의 진술은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 나의 삶의 궁극지점이 거기에 메여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로부터 나의 삶의 전체가, 개개의 행위와 태도와 발화가 규정되고 또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는 형식적 규정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Worumwillen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방향지어져 있다. 불투명하게라도 그 인간의 나름의 상황과 역사에 따라서 그것은 그를 이끌어나가고 살아가게끔 만든다. 죽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생물학적인 쾌락에서부터 가장 고차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적 지식욕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레종 데트르가 우리로 하여금 "다행히도" 살아있게 해준다.

당신이 광대무변한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모래알갱이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 단 1밀리미터 옆으로 옮겨놓았다고 하자. 자, 이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적으로 무의미한 행위이다."
2. "(환호와 함께) 난 우주에 변화를 일으켰다!"

네이글은 우주적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허무주의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공간을 떠올려 볼 때 한 인간이 가진 삶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가라는 생각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곧 1번 답변과 상통한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되는 2번을 택할 수도 있을까?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오스카를 통해 2번 답변을 내놓는다. 어린아이의 웃음을 가진 초인인 걸까? 실제로 오스카가 어린 아이이기에 가능한 걸까? (오스카는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사막 모티프도 거기서 따온 것임.)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잠언 혹은 헛소리 1

1. 성의 해방은 여성의 평등한 권리가 완전히 확보되었을 때에야 시작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에야 비로소 성의 해방을 주창할 권한이 제대로 성립될 수 있다.

2. 왜 나는 타인의 앞에서 혹은 공공의 장소에서 옷을 벗거나 자위를 해서는 안 되는가? 여기서 타인의 문제제기는 논외로 하자. 즉, 타인이 불쾌감, 성적 수치심, 과도한 정서적 불안정을 느끼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논거는 배제하도록 하자. 그럼에도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의 성적 수치심 때문에? 만일 그것이 답이라면 그러한 성적 수치심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는가?

3. 성적 수치심의 형성 배경. 자아의 자존감을 위하여? 글쎄, 그보다는 자기보호 심리기제의 하나인 것 같다. 성적 수치심이 없는 인간임이 타인에게 발각되면, 타인에게 성적 남용 당할 우려가 있다. 그 때문에 성적 수치심이 생긴다. 성적 수치심이 진화심리학적으로 습득 혹은 문화적으로 학습된다.

4. 만일 2와 3의 추론이 옳다면 다음이 결과할 수 있다.
타인이 나의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내가 성적 수치심이 없다면, 그리고 타인에 의한 성적 남용의 우려가 전무하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공공연하게 옷을 벗거나 자위를 해도 무방하다.
정말 그러할까?

5. 사회문화적 금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금기는 특정 기능을 배경으로 형성된다. 금기의 형성은 십수만년 전일 수도 있고 수천, 수백년전 일 수도 있다.

6. 그러나 그 금기와 그것을 형성케 한 이유인 그것의 기능은 필연적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특정 금기가 지녀오던 기능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때 금기는 구습이 된다. 그것은 폐기되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대개는 폐기되는 것이 좋다. 불필요한 행위의 구속은 악이라는 점에서. 일반 관념의 전반적 교정에 따른 부담이 과도하게 크지만 않다면.

7. 그러나 우리가 금기의 형성배경과 원인을 남김없이 모조리 알아낼 수 있을까?

8. 또한 금기의 인위적 폐지가 사회적으로 가능한가? 하지만 이는 부차적 문제이다.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

2010년 2월 2일 화요일

인식론의 근본문제 - 외부세계의 실제성 증명에 대하여 1

인식론의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는 외부세계가 진짜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린가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 덕분에 이 주제는 이제 제법 친숙해지지 않았나? 영화 매트릭스가 퍼트남을 통해 널리 알려진 "통속의 뇌"로부터 아이디어를 빌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매트릭스에서는 디지털로 만들어진 순전한 가상의 세계와 실제의 몸이 놓여있는 진짜 세계가 대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회의를 가지지 않는다. 회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함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의 세계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디지털 정보처리 상의 오류로 인해서 가상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내 눈 앞에 있던 책 한 권이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어제 만났던 흑인친구가 오늘 백인으로 바뀌어 있는 식이다. 일반적인 상식 혹은 자연의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이 아주 드물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이미 말했듯 실제 세계의 전산 오류다. (흑. 어쩌면 과학적으로 해명 불가능한 온갖 신비주의적 현상의 원천은 이러한 전산오류인지도 모른다! 뭐,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상세계 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원인을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이상현상을 애써 무시, 외면하고 자신의 착각으로 치부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의 실제성에 대한 확고하고도 자명한 믿음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특별한 인간인 네오는 저러한 균열 덕분에 자신이 사는 세계가 가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이르게 된다. 아니 적어도 그런 의심에 일조하게 된다. 영화를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1편에 그렇게 읽힐 만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영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영화평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영화와 무관하게 우리는 디지털 시뮬레이션 세계와 그것을 가동시키는 실제 세계의 이분을 상상해볼 수 있다. 또한 실제세계의 전산오류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가상세계의 균열이, 비상식적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일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현상이 빈번하게 반복된다면, 가상세계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진짜가 아님을 알려주는 신호로서 혹은 적어도 의심의 계기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 거꾸로 보자면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자명하게 진짜라고 여기는 것은 그 세계가 이상현상이 없는 안정적인 일상성의 공간, 일정한 상식과 규칙에 의해 지배되며 누적된 경험에 따라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도 허용하는 곳이라는 점과 어느 정도 관련되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상현상이 발생하는 카오스의 세계라면, 안정적인 일상을 제공해줄 수 없는 세계라면, 지금 우리가 세계의 실제성에 대해서 가지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드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안정성이 우리가 세계의 실제성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한다.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알페신(Alpecin), 한국과 독일 가격 차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탈모방지 카페인 샴푸 알페신.

나도 한국에서 한 번 구입해본 적이 있다. 샴푸(250ml) 하나, 리퀴드(200ml) 하나. 어떤 식으로 유통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된 건지 아마도 모든 한국 사이트에서 알페신 가격은 동일하다. 샴푸 39000원. 리퀴드 69000원. 일반 샴푸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나게 비싸다.

 

http://happymaker.co.kr/mart7/mall.php?cat=008028001&query=view&no=582

 

그런데,,

독일에 와서 이게 독일제품인 게 기억이 나서 혹시나 좀 쌀까 싶어 가격을 확인해보니 이게 웬걸 가격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https://www.medikamente-per-klick.de/shop/produkte/produktdetails.html&pzn=1099383

 

여기는 5.94 유로!

 

http://www.amazon.de/dp/B000ORQXSC/ref=asc_df_B000ORQXSC542651/?tag=dooyoo&creative=7986&creativeASIN=B000ORQXSC&linkCode=asn

 

아마존에서는 7.76 유로에 판다.

 

6유로면 우리 돈으로 만 원도 채 안 한다. 우리나라에서 69000원이니 딱 7배 차이인 셈이다. 아마존에서야 국제 배송이 될테니 그냥 아마존에서 구매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김광석과 어떤 독일 힙합그룹(die Orsons)

야심한 밤에 유튜브로 이런 저런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간만에 김광석의 그야말로 주옥같은 명곡들을 한참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어 댓글이 눈에 띄어 읽어봤더니 "die Orsons"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있었다.

 

뭔 소릴까 싶어 구글에 검색해보니 얘네들은 독일 힙합그룹이다.

 

그런데 이들이 "김광석"이라는 노래를 불렀다지 않은가?

 

감사한다는 건 그들 덕분에 김광석이라는 독일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을 한 훌륭한 가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래는 그들이 부른 노래 "김광석"의 뮤직 비디오와 가사 및 번역이다.

 

번역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라.

 

http://www.youtube.com/watch?v=ngvc0mXqwkk&feature=related

 

 

[1. Strophe]
In einem Land

어떤 나라에
in dem der Lebenslauf noch mehr zählt als bei uns

이력서가 우리나라에서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und man dem Chef auf's Wort gehorcht

사장의 말에 낱낱이 복종해야 하는
fast wie ein Hund

꼭 개 마냥
(die man dort übrigens auch isst im Restaurant)

(그건 그렇고 거기에서는 식당에서 개를 먹는다)
da gab's 'nen Sänger und der war noch ziemlich jung

그곳에 한 가수가 있었는데 아직 퍽 젊었다
(der hat)

(그런데 그는)
nicht gern im Fernsehn oder Radio gesung'

티비나 라디오에서 노래하기를 즐기지 않았고
(sondern)

(대신에)
direkt vor dem Publikum

직접 청중 앞에서
so wie wir hier grade, Hallo

꼭 우리가 바로 여기서 그러는 것처럼, 헬로~
zurück zur Story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er hat wie gesagt gesung'

그는 앞에 말한 것처럼 노래했지
und zwar die traurigsten Lieder der Welt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들을
von seinem tausendsten Gig zurück gekomm'

그런데 천 번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뒤
alles ist verstummt

정적이 찾아든다
denn er brachte sich um

그가 자살했기 때문이지

Er Kurt Cobain'te sich in 1996

그는 1996년에 커트코베인했다
gib sein' Namen in YouTube ein und wein

그의 이름을 유튜브에 입력해라 그리고 흐느껴라

wir buchstabiern ihn dir:

우리가 당신에게 그의 이름의 철자를 알려주겠다
KIM KWANG SEO K IM KWANG SEO K IM KWANG SEOK

카 이 엠 카 붸 아 엔 게 에스 에 오 킴 쾅 세오크
Kim Kwang Seok

[Refrain]
Du warst der Bob Dylan von Korea

당신은 한국의 밥딜런이었소
du bist Koreas Kurt Cobain

당신은 한국의 커트 코베인이오
deine Stimme klinkt wie Ewigkeit wie Trän'

당신의 목소리는 울려오오, 영원처럼, 눈물처럼
2x

KIM KWANK SEOK

[2. Strophe]
Nach seinem tausendsten Konzert

천 번째 공연 후에
(nach seinem tausendsten konzert)

(천 번째 공연 후에)
hat er sein Zimmer zugesperrt

그는 방문을 걸어 잠궜다
(hat er sein Zimmer zugesperrt)

(그는 방문을 걸어 잠궜어)
er war 32 Jahre jung

그는 32살이었다
er hat von uns'rer Fröhlichkeit, Traurigkeit und uns'rer Heiligkeit gesung'

그는 우리의 기쁨, 슬픔, 성스러움에 대해 노래했다
nur hat's keiner verstanden

다만 그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뿐이야
(weil's auf koreanisch war)

(한국어로 되어있으니까) 
und es vor '96

그리고 96년 이전에는
(noch kein Youtube gab)

(아직 유튜브가 없었다)
er hat gesung' für die Leute mit kleinen Stimm' wie uns

그는 우리 같은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을 위해 노래했지
(wie uns)

(우리 같은)
und wir hör'n jetzt hin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의 노래를 듣는다

wie buchstabiert man dich Kim


KIM KWANG SEO K IM KWANG SEO K IM KWANG SEOK

[REFRAIN]
2x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거의 추모곡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 대한 약간의 비꼼과 함께.

 

참고로 가사는 내가 듣고 적은 것은 아니고

http://www.magistrix.de/lyrics/die%20Orsons/Kim-Kwang-Seok-414509.html

여기에서 가져온 거다.

가사를 이해하면서 뮤직 비디오를 보면 더 재미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해하지 못해. 왜냐면 한국어니까!" 하는 부분에서 한글이 아닌 한자가 나온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