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9일 수요일

레종 데트르, 삶의 의미, Worumwillen

레종 데트르의 물음은 삶의 의미의 물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왜? 그 물음이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 형이상학적 설명과 근거 제시가 아니므로.

이 물음은 오직 인간만이 물을 수 있다. 자기성을 가질 정도로 초월적이면서도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유한자이므로.

레종 데트르, 삶의 의미는 형식적으로만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Worumwillen이다. 그것은 나의 실존이 그때마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걸려있는 실존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가장 고유한 실존가능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오로지 유일한 나로서 개별화시키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미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내게 다가오지만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나의 삶의 의미가 완성되었다는 식의 진술은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 나의 삶의 궁극지점이 거기에 메여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로부터 나의 삶의 전체가, 개개의 행위와 태도와 발화가 규정되고 또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는 형식적 규정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Worumwillen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방향지어져 있다. 불투명하게라도 그 인간의 나름의 상황과 역사에 따라서 그것은 그를 이끌어나가고 살아가게끔 만든다. 죽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생물학적인 쾌락에서부터 가장 고차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이나 과학적 지식욕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레종 데트르가 우리로 하여금 "다행히도" 살아있게 해준다.

당신이 광대무변한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모래알갱이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 단 1밀리미터 옆으로 옮겨놓았다고 하자. 자, 이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적으로 무의미한 행위이다."
2. "(환호와 함께) 난 우주에 변화를 일으켰다!"

네이글은 우주적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허무주의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공간을 떠올려 볼 때 한 인간이 가진 삶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가라는 생각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곧 1번 답변과 상통한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되는 2번을 택할 수도 있을까?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오스카를 통해 2번 답변을 내놓는다. 어린아이의 웃음을 가진 초인인 걸까? 실제로 오스카가 어린 아이이기에 가능한 걸까? (오스카는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사막 모티프도 거기서 따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