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일 화요일

인식론의 근본문제 - 외부세계의 실제성 증명에 대하여 1

인식론의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는 외부세계가 진짜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린가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 덕분에 이 주제는 이제 제법 친숙해지지 않았나? 영화 매트릭스가 퍼트남을 통해 널리 알려진 "통속의 뇌"로부터 아이디어를 빌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매트릭스에서는 디지털로 만들어진 순전한 가상의 세계와 실제의 몸이 놓여있는 진짜 세계가 대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회의를 가지지 않는다. 회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함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의 세계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디지털 정보처리 상의 오류로 인해서 가상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내 눈 앞에 있던 책 한 권이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어제 만났던 흑인친구가 오늘 백인으로 바뀌어 있는 식이다. 일반적인 상식 혹은 자연의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이 아주 드물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이미 말했듯 실제 세계의 전산 오류다. (흑. 어쩌면 과학적으로 해명 불가능한 온갖 신비주의적 현상의 원천은 이러한 전산오류인지도 모른다! 뭐,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상세계 내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원인을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이상현상을 애써 무시, 외면하고 자신의 착각으로 치부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의 실제성에 대한 확고하고도 자명한 믿음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특별한 인간인 네오는 저러한 균열 덕분에 자신이 사는 세계가 가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이르게 된다. 아니 적어도 그런 의심에 일조하게 된다. 영화를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1편에 그렇게 읽힐 만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영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영화평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영화와 무관하게 우리는 디지털 시뮬레이션 세계와 그것을 가동시키는 실제 세계의 이분을 상상해볼 수 있다. 또한 실제세계의 전산오류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가상세계의 균열이, 비상식적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일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현상이 빈번하게 반복된다면, 가상세계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진짜가 아님을 알려주는 신호로서 혹은 적어도 의심의 계기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 거꾸로 보자면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자명하게 진짜라고 여기는 것은 그 세계가 이상현상이 없는 안정적인 일상성의 공간, 일정한 상식과 규칙에 의해 지배되며 누적된 경험에 따라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도 허용하는 곳이라는 점과 어느 정도 관련되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상현상이 발생하는 카오스의 세계라면, 안정적인 일상을 제공해줄 수 없는 세계라면, 지금 우리가 세계의 실제성에 대해서 가지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드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안정성이 우리가 세계의 실제성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한다.